요즘 언론사 세무조사를 한다니 여야가 언성을 높이고, 언론사끼리도 대응 양상이 사뭇 달라 국민들은 그저 씁쓸할 뿐이다. 현 집권여당은 ‘구여의 94년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만을, 현 야당인 구여는 최근 드러난 현 집권여당의 ‘언론통제 시나리오 문건’만을 각각 국정조사 해야 한다고 저마다 목청을 돋우고 있다. 언론사도 받아야 할 세무조사는 당연히 받아야 한다. 언론사라고 예외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유와 목적이 통상적인 것이냐, 아니면 정치적인 것이냐의 여부에 있다. 당·정은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에 정치적인 목적이 전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대형 세무조사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이다. 국민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최근 정치권 공방을 보는 국민의 눈매는 지독히도 냉소적이다.
지금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가장 큰 언론사의 매출액이 연간 4000억원 정도이다. 여기에 투입된 세무조사 인력은 50여명에 이른다. 최근 세무조사를 받은 매출액 2조원의 모 건설회사에 투입된 조사요원은10명이었다. 매출액으로 단순 비교하면 이 신문사는 무려 25배나 많은 조사요원, 즉 25배나 높은 강도로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것은 세무조사가 아니라 ‘세무사찰’이라고 해야 옳다.
세무조사는 탈루세액을 색출, 과세처분하는 행정행위다. 즉 ‘세금을 제대로 거둘 목적’으로 과세당국이 행하는 조치다. 이런 목적을 벗어나면 세무조사는 위법한 행정행위가 된다. 미국의 판례는 “특정 정당이나 단체에 대한 탄압·보복·차별 등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다른 분쟁의 해결수단으로 납세자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 등은 세무조사권의 목적을 넘는 것으로 위법하다”고 판시하고 있다.
“언론개혁을 화두로 잡자면, 그리 못할 게 없다”고 혹자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개혁’을 왜 정도가 아닌, 세무조사라는 수단으로 하려는가. 혹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면 우리나라는 참으로 ‘걱정되는’ 나라다. 세무조사가 정치적으로 악용돼온 것은 그 막강한 권한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국세청의 ‘조사 사무처리규정’에 따르면 세무조사는 매 시기 상급자의 지휘·감독 아래서 이뤄진다. 궁극적인 상급자는 국세청장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조사요원의 숫자는 물론, 조사대상·조사기간·조사강도, 심지어 추징세액까지 대충 결정된다. 국세청장은 대통령의 ‘핵심 충복’ 중 한 명이다.
그래서 정권 눈 밖에 난 기업들 대부분은 대출 중단 못지않게 세무조사를 무서워한다. 복잡한 세법과 잦은 법 개정, 그리고 뿌리깊은 분식회계와 과도한 세율 때문에 세무조사로부터 자유로운 기업은 거의 없다. 이런 환경이 친정부용 비자금을 낳았다.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은 비자금으로 빠져나간 세금을 근로소득자 등 선량한 납세자들이 꼬박꼬박 대신 물어왔다는 점이다.
세무조사권의 남용을 막고, 대상 선정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가 없는 한 이 같은 사슬구조는 꾸준히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어제의 ‘쫓는 자’가 내일의 ‘쫓기는 자’로 뒤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우선 국세청장의 임기를 중앙은행 총재의 그것처럼 보장해 국가 재정대계를 위해 추호의 흔들림없이 임무수행토록 해야 한다. 또 정치적 목적 등 부당한 목적으로 세무조사를 수행할 경우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고, 세무조사 대상자를 선정할 때 비정부기구(NGO) 인사나 민간전문가가 참가하도록 해야 한다. 정치적 목적의 세무조사인지 일반인이 알 길이 없으므로 국세청의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규정도 법에 명시해야 한다.
이 모든 게 법에 명시돼야 한다. 이를 법제화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진짜 민주주의 세력이다. 그렇지 못한 가운데 벌어지는 작금의 ‘정치공방’은 3류 코미디만도 못하다. 공권력과 납세자 사이에 세금을 둘러싼 흥정의 여지가 남아있는 한, 제도정치권 내에서 제기되는 모든 의혹과 주장, 해명과 공방은 한낱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 납세자들은 잘 알고 있다.
(조선일보 200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