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정법원이 지난 10일 “청와대 특수활동비 집행내역과 김정숙 여사의 옷값 등 의전비용, 워크숍에서 제공한 도시락가격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한국납세자연맹이 소송을 제기한지 3년만에 내린 판결이다.
특수활동비는 기밀이 요구되는 국정수행에 사용되는 예산이다. 국가정보원을 제외한 17개 정부 부처와 국회, 대법원에서 2471억원을 편성해 사용하고 있다. 이 제도는 여러 측면에서 납세자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우선 공무원이 영수증 없이 국가 예산을 사용하도록 허용, 사실상 ‘세금 횡령 면책권’을 주는 엄청난 특혜다. 중세 서양의 성직자 면세(免稅) 특권과 다를 바 없다. 노르웨이 총리실은 “총리가 영수증을 첨부하지 않으면 어떤 책임을 지는가?”라는 한국납세자연맹의 질문에 “총리 스스로 사임하거나 탄핵될 것”이라고 답변을 보내왔다.
예산 집행내역이 공개되지 않으면 공무원 부패를 감시할 수 없는 측면도 중요하다. 사용내역 비공개를 용인하는 제도는 국민이 공무원에게 세금을 제멋대로 쓰라고 백지수표를 준 것과 같다. 공무원이 사용한 예산정보를 투명하게 파악할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면서 납세의무만 짊어진다면 그 자체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투명한 정보공개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밑바탕이 되는 점은 특활비 문제의 핵심이다.
행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 영부인의 옷값 구입에 국민 세금이 지원됐는지 투명하게 공개되는 것은 국가 신뢰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어떤 사람은 그 옷값을 인정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특권’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누가 옳든, 관련 정보가 완전하고 투명하게 공개되는 시스템을 갖춘 나라만 국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국민이 공개된 정보로 토론하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도, 좌우 진영논리도 사라진다.
특활비 오남용은 공직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제도의 문제다. 예산을 영수증 없이 현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면, 누구나 해당 예산을 사적으로 부당하게 사용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안보 목적의 국정원 특활비가 마냥 감사의 사각지대에 머무르는 것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부처의 기밀예산을 국회의 특별위원회가 철저히 감사한다. 스웨덴의 낮은 공직 부패는 1766년 세계 최초로 만든 ‘정보공개법’과 밀접하다. 조선 영조 때다.
한국의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정보공개법 )’보다 약 8배나 긴 분량의 스웨덴 정보공개법에는 예외 조항인 ‘비공개 사유’가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적시돼 있다. 예외조항 외에는 무조건 공개해야 한다. 공무원의 재량 여지는 없다. 반면 한국은 공무원이 ‘수사중’, ‘감사중’, ‘검토중’이라는 이유를 골라 언제든 비공개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공개해야 할 정보’를 완전히 감출 수 있는 ‘정보 비공개 핑계법’인 셈이다.
국가로부터 업무용 휴대폰을 지급받는 스웨덴 공무원의 경우 통화기록 일체, 업무용 이메일 내역이 전부 정보공개 대상이다. 정보공개청구를 받은 공무원은 자신의 공무상 결정내용과 이유를 빠짐없이 공개해야 한다. 국세청 공무원이라면 세무조사 추징세액도 예외가 아니다.
청와대 특수활동비 내역 등을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청와대가 항소하고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만료로 관련 정보가 대통령기록관으로 넘어가면 박근혜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각하(却下) 처분이 내려질 수 있다. 현행 법령상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된 정보는 정보공개 소송 중이라도 비공개 대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들이 박근혜 정부의 이른 바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에 맞서 ‘촛불’로 만들었다. 그 뜻을 기려 이번 판결을 받아들여야 한다. 박근혜 정부처럼 항소하지 말고 특활비 내역 일체를 공개, 검찰 등 다른 모든 국가기관 특활비 공개의 계기와 모범이 돼야 한다. 투명한 국정을 바란 민심의 산물인 문재인 정부에게 이는 ‘특별히’ 당연한 책무이자 업적이다.